한국인의 밥상을 보다 보면 평범해 보이는 식재료 하나가 한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이번에 소개된 곳은 전북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흥부마을입니다.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이 마을에서는 여름철이면 유난히 ‘박’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걸까요? 남원 인월면 성산리는 흥부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매년 음력 9월 9일이 되면 주민들이 모여 흥부를 기리는 제를 올릴 만큼 마을의 전통과 이야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박은 흥부전의 상징적인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흥부마을에서는 박이 단순한 농작물을 넘어 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식재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에게 박은 익숙한 먹거리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시집와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이웃들은 함께 농사를 짓고 아이를 키우며 음식도 나눠 먹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박을 활용한 음식 역시 세대와 이웃을 이어주는 마을 음식이 됐습니다.

박은 익은 정도와 부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남원 흥부마을에서는 박 자체의 순하고 담백한 맛을 살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먼저 연한 박의 속과 과육은 소고기와 함께 끓여 소고기 박국으로 즐깁니다. 자극적인 양념을 많이 넣기보다 박에서 나오는 시원하고 부드러운 맛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덜 여문 박은 들기름에 볶아 박나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들기름이 어우러져 소박하지만 밥과 잘 어울리는 반찬이 됩니다. 가을에는 박을 길게 썰어 말려두는데, 이렇게 만든 박고지는 겨울철 음식으로 활용됩니다.
불린 박고지에 들깨를 넉넉하게 넣으면 구수한 박고지 들깨탕이 완성됩니다. 여름에 수확한 박을 말려두었다가 추운 계절에도 먹을 수 있었던 셈입니다. 박잎 역시 버리지 않습니다. 호박잎보다 부드러운 박잎은 밀가루 반죽을 입혀 전으로 부쳐 먹습니다.

하나의 식재료를 잎부터 과육, 씨가 들어 있는 속까지 다양하게 활용하는 모습에서 옛 농촌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흥부마을 음식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박으로 만든 바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생활용품으로 사용했던 박바가지가 이곳에서는 밥그릇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나물과 박나물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음식이 바로 흥부잔칫밥입니다. 화려한 재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마을에서 직접 얻은 식재료와 박 하나만으로 푸짐한 한 끼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음식은 단순히 ‘박으로 만든 향토음식’이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흥부마을에서 박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주민들이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를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생활문화이기도 합니다.
흥부마을에는 음식 외에도 흥부 이야기에서 비롯된 독특한 마을 전통이 있습니다. 바로 자녀가 많은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흥부상’입니다. 세 자녀를 키우는 가정도 적지 않지만, 마을에는 네 명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도 많아 세 아이만으로는 흥부상을 받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자식이 가장 큰 복’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전통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결국 남원 흥부마을의 이야기는 박 하나에서 시작해 음식과 가족, 이웃 그리고 마을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만난 소박한 박요리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리산 자락의 남원 흥부마을을 찾는다면 단순히 흥부전의 배경을 둘러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박국과 박나물, 박고지 들깨탕처럼 지역의 생활문화가 담긴 음식에도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한때 흔한 농작물이었던 박이 어떻게 마을의 이야기와 전통을 이어주는 음식으로 남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남원 여행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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