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에서는 전남 해남군 송지면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늙은 호박을 이용해서 만든 음식을 만나 봅니다. 흔히 늙은호박은 호박죽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땅끝 해남에서는 왜 이렇게 귀한 식재료로 여기는 걸까요?

땅끝 해남의 바닷가에 자리한 동현마을은 바다와 밭이 가까운 곳입니다. 마을 밭에서는 해풍을 맞으며 자란 늙은호박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주민들은 이를 ‘마을의 황금’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의 늙은호박은 수확하자마자 바로 사용하는 것보다 일정 기간 충분히 숙성시키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수확한 호박을 쌓아두고 수분을 날리면서 단맛을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풋호박과 달리 늙은호박은 충분히 익으면서 맛과 식감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동현마을에서는 늙은호박을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완성하는 식재료로 바라봅니다.

동현마을 음식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메뉴는 늙은호박보양찜입니다. 먼저 늙은호박의 윗부분을 잘라 속을 파낸 뒤 찹쌀을 비롯해 전복, 낙지, 대추 등을 넣습니다. 여기에 꿀을 더한 다음 호박을 다시 덮고 겉면에 진흙을 발라 천천히 익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조리 시간이 상당히 긴 음식입니다.
왕겨불을 이용해 낮은 온도에서 오랜 시간 익히기 때문에 호박의 단맛과 해산물의 감칠맛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빠르게 익히는 일반적인 찜 요리와 달리 시간 자체가 맛을 만들어주는 음식인 셈입니다.

동현마을 밥상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바다와 밭의 식재료를 함께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바다에서 잡은 장어에는 풋호박과 호박순을 넣어 풋호박 장어탕을 끓입니다. 장어의 진한 맛에 호박의 부드러운 맛이 더해져 든든한 국물 요리가 됩니다. 호박잎과 가지는 밥을 지을 때 함께 쪄내기도 합니다.
별도의 조리 과정을 줄이면서 밥과 반찬을 한꺼번에 준비할 수 있어 예전 살림살이의 실용적인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지락은 애호박과 함께 무쳐 새콤한 반찬으로 만들고, 늙은호박은 반달 모양으로 썰어 말려둡니다. 이렇게 만든 호박고지는 겨울철에 다시 꺼내 떡이나 식혜에 활용합니다.

해남 동현마을의 호박 음식은 제철에 수확한 식재료를 오랫동안 보관해 먹는 전통과도 연결됩니다. 특히 늙은호박을 말려 호박고지로 만드는 방식은 겨울철 먹거리를 미리 준비하던 저장법입니다. 말리는 과정에서 수분이 빠진 호박은 계절이 바뀐 뒤에도 다양한 음식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호박고지떡이나 호박식혜처럼 단맛을 살린 음식으로 만들면 늙은호박 특유의 풍미를 색다르게 즐길 수 있습니다. 동현마을의 밥상에는 음식뿐 아니라 세월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생각도 담겨 있습니다. 풋호박이 싱그럽고 부드러운 맛을 가진다면 늙은호박에는 시간이 지나며 만들어진 깊은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는 팔순이나 구순을 맞은 어르신을 위해 객지에 나간 자녀들이 주민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풍습도 이어집니다. 오래 살아온 시간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밥상 해남 편에서 만난 늙은호박은 단순한 제철 음식 이야기가 아닙니다.
해남 송지면 동현마을의 자연환경과 저장 음식 문화, 바다와 밭에서 얻은 식재료를 아끼는 생활 방식, 그리고 어르신들의 삶을 존중하는 공동체 문화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해남 여행을 계획한다면 땅끝의 아름다운 풍경만 둘러보기보다 이런 지역의 음식문화에도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늙은호박 하나에도 계절을 기다리는 시간과 마을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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